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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4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문선명 총재 자서전 발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문선명 총재 자서전 발간
인류 공동번영 위한 헌신과 사랑
고독했던 ‘평화의 긴 여정’ 담담히…
  •  문선명(文鮮明·1920∼ ).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이단 통일교 교주’니, ‘세계적인 종교지도자’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세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붓다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도 당대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다. 과연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해 어떤 가르침을 주었고, 어떻게 헌신했는지가 기준이 될 것이다. 올해 초 건강한 모습으로 구순을 맞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문선명 총재가 남다른 삶을 살아온 자신의 생애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김영사)라는 자전 에세이를 통해서다. 아직 끝나지 않은 평화 여정에서 그가 담담하게 회고하는 인생 역정은 대부분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다.

    ◇문선명 총재가 1990년대 여름철 어느날 인류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며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대하를 이루는 거대한 물줄기였다. 펄펄 끓는 불덩어리였다. 잠자는 의식을 흔들어 깨우는 청천벽력이었다. 눈물로 채운 마음의 강이었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문용명. 그는 농부였던 아버지의 넓은 등에 업혀 평화를 배웠다. 아버지 등에만 업히면 걱정도 사라지고, 마음이 척 놓이는 그 기분, 바로 평화였다. 그가 이념과 종교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고 원수로 여기는 나라 사이에서 평화의 다리를 놓는 일에 평생을 바친 것도 이때 싹튼 것으로 보인다.

    유난히 눈이 작아 ‘오산집 쪼끔눈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누구보다 정확하고 사려 깊었다. 그는 철도 들지 않은 유년시절부터 불쌍한 사람 돕기를 즐겼다. 그의 집 연자방앗간은 팔도 거지들의 보금자리였다. 문용명은 겨우내 집에서 숯불을 가져다 방앗간을 덥혔고, 밥도 나눠 먹었다. “팔도강산 사람들에게 밥 먹여야 큰 복 받는다” 는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속에서 성장했다.

    문용명은 목사이자 독립지사였던 작은할아버지 문윤국의 영향으로 온 가족이 일찍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는 소 꼴 먹이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자연 생태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대목은 살아 있는 생물도감을 보는 듯 흥미롭다. 그는 자연을 알지 못한 채 학습하는 오늘의 대학교육은 물신론자만 키울 뿐이라고 걱정한다. 문용명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비우면 ‘무아(無我)’가 아닌, 대자연이 들어온다는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그것은 ‘무아’를 넘어서는 경지였다.

    ◇1991년 북한을 방문한 문선명 총재가 김일성 주석과 포옹하고 있다.

    14살이 되던 해 문용명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진학하지만, 일본말을 가르치지 않아 정주공립보통학교로 옮겼다. 일본을 극복하려면 일본말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여느 학생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증조할아버지 산소 이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삶과 죽음에 의문을 갖게 됐고, 종교에 천착하게 된다.

    그는 16살 되던 부활절 전야에 마을 뒤 묘두산에 올라 밤새 기도하다가 신새벽 “하나님이 너무 슬퍼하고 계시니 하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맡아 달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다. 몇 번이나 간곡히 사양했지만 거스를 수 없었다. 이때 평화세계를 향한 대장정의 점 하나를 찍는다.

    서울 흑석동에서 자취하며 경성상공실무학교에 다닐 적에도 틈틈이 한강대교 밑 빈민굴을 찾아가 걸인들의 머리를 깎아줬고, 일요일에는 교회 주일학교 반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밤에는 산에 올라 정성들여 기도했다. 보통 사람으로는 흉내 내기조차 힘든 생활이었다.

    문용명은 21살 때인 1941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와세다대 부설 고등공학교 전기공학과 재학중 유학생들로 구성된 지하 독립운동 조직에서 도감(都監) 책임자가 돼 임시정부를 도왔고, 일본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문과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 시절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자지간(父子之間)’으로 푼 뒤, “하나님이 인류의 고통을 보시며 그토록 슬퍼하신 것을 깨닫는 순간 우주의 모든 비밀이 다 풀렸다”고 밝히는 대목은 환희심을 느끼게 한다. 25세 때였다.

    ◇문 총재가 다양한 포즈로 제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

    책에는 문 총재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남과 북, 일본과 미국 등에서 6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른 파란만장한 스토리와 수감생활이 상세히 소개된다. 문 총재는 부산 피란시절 30대 중반의 나이에 만유의 근본원리를 밝힌 ‘원리강론’을 집약해 완성해 낸다. 그것은 인류 숙원을 시대에 맞게 해결해 낸 열쇠였고, 행복에 이르는 구체적 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16세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살이를 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지만, 자신이 기성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려 수난을 당하자 견디지 못하고 이혼해야 했던 사실도 숨김없이 밝힌다.

    두 번째로 만난 23살 연하의 아내 한학자 여사에게는 공인인 종교지도자를 내조하고, 13명의 자녀를 키우면서도 의연하고 현숙한 여인의 자세를 한치도 흐트러뜨리지 않은 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고백한다.

    그는 1991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두 극단적 인물이었지만 서로 껴안으며 8살 위의 김일성과 형님·동생 관계를 맺었고, 이에 앞서 1990년 철의 장막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날 때는 “개방에 성공하려면 종교 자유를 인정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두 정상과의 우호적인 만남은 한·소 국교 정상화 등 관계 개선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

    책에는 그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도 소개된다. 또한 인류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펼쳐온 각종 지원사업은 인류 사랑이 절절이 담겨 가슴 뭉클하다. 문 총재는 “민들레 한 포기가 황금보다 귀하다”며 물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환경문제를 야기한다는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그가 바다에 묻힌 수소에너지를 논하고, 한국과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대목들도 주목된다. 그가 즐겨 신는 구두는 대형할인점에서 산 4만9000원짜리라고 한다.

    책 속에는 행복과 평화에 다가가는 대각의 소리가 곳곳에 돋아나온다. 어머니와 여동생 등 가족을 비롯해 조국, 민족, 인류, 나아가 하나님을 위해 고뇌하는 책 전반부는 특히 감동적이다. 구순인 지금도 허름한 스웨터를 입고 세계를 돌며 평화사상을 전하는 그는 우리시대 다정한 아버지 같은 거인으로 서 있다.

    “나에게 삶은 어느 누구와도 의논할 수 없는 고독한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내 마음속 폭풍 같은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Posted by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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